가벼운 나날 - 제임스 설터 / 박상미 역 ▪ Books


친구에게 선물로 받은 책입니다. 선물로 받지 않았다면 읽을 일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평소 제가 책을 고르는 방식상 접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종류의 책입니다. 아주 유명한 고전도, 잘나가는 장르소설도 아니고, 출판된지 40년가량 지난 어정쩡한 시대의 소설이며, 작가의 이름조차 생소합니다.

이 소설은 지극히 사실적인 어느 부부의 이야기입니다. 네드라와 비리, 그리고 두 딸의 아주 평범한 일상을 묘사하기 시작하며 그들의 외도, 어긋남, 그러면서도 유지되는 부부관계, 그러다 문득 찾아온 이혼, 이혼 이후의 자유, 혼란, 그리고 죽음까지 아주 담담하게 보여줍니다.

작가는 (아마도) 의도적으로 이야기 중간에 네드라와 비리의 죽음 뿐 아니라 다른 등장인물의 죽음들로 세상의 모든 죽음들을 암시적으로 보여줍니다. 어마어마한 사건이 아니라 너무나 평범하고, 일상적이기까지 한 죽음. 그것이 주인공에게 다가왔을 때에도 죽음은 여전히 일상적입니다.

커다란 사건 없이 진행되는 줄거리 뿐 아니라 대화들 마저도 너무나 사실적이라, 처음 몇 페이지를 읽었을 때 당장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 홍상수 감독의 영화들이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페러디한 게콘의 코너였죠. "우리 헤어져, 아저씨 여기 불좀 갈아주세요" 식의.

우스운 대화이지만 헤어진다는 -그당시 그들에게는- 커다란 사건과, 불을 갈아야 한다는 또 다른 일상적 필요가 얽혀 돌아가는 것이 인간사이고, 우리네 인생은 그렇게 돌아가다가 결국 모두 죽음에 이른다는 것이 작가가 우리에게 들려주고싶은 이야기가 아닐까 싶네요.

에피소드들의 장면/시간 전환은 갑작스러우면서도 자연스럽고, 일상의 묘사는 너무나 아름답습니다. 비록 번역된 문장들이지만 원어가 얼마나 아름다왔을지 추측이 가능할 정도로 묘사가 간결하고 아름답습니다.

인생이 뭐 그렇지. 라는 대리만족적 위안이 되는, 한편으로는 정말 그게 전부? 라는 철학적/종교적 의문을 갖게 해주는, 그런 독서였네요. 친구여 쌩유.







덧글

  • gershom 2013/12/06 10:08 # 답글

    읽으셨을지 모르나 필립 로스의 책을 조심스럽게 권해봅니다.
  • CelloFan 2013/12/06 11:14 #

    휴먼 스테인의 '필립 로스' 로군요. gershom 님 추천작은 어떤건가요? 읽어보고 싶어요!
  • bonjo 2013/12/06 17:42 #

    오 필립 로스. 읽어보겠습니다.
  • gershom 2013/12/09 10:49 #

    필립 로스의 번역된 책이 몇 종 없더군요.
    에브리 맨, 나는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울분 정도..
    본조님의 글을 읽으면서 떠올랐던 책은 에브리맨입니다.

    소개하신 책 표지가 낯 익어서 살펴보니 역자가 박상미네요.
    에드워드 호퍼에 대한 책인 빈방의 빛을 번역한 그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급 관심이 생기면서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 bonjo 2013/12/09 16:40 #

    예 필립로스로 검색을 해보니 에브리 맨이 죽음에 관한 이야기더군요.
    이거 말씀하셨나보다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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