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의 섬 - 움베르토 에코 / 이윤기 역 ▪ Books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들은 장미의 이름을 제외하고는 리뷰를 읽어봐도 어떤 책인지 감이 잘 잡히지 않습니다. 설명하기 까다로운 면도 있고 뼈대가 되는 줄거리를 요약해놓아도 그것만으로는 설명이 안되기 때문이죠. 이 책도 리뷰를 봐도 이해가 안됐고, 책 자체를 중간정도 읽을 때까지도 감이 안왔습니다. 솔직히. 그리고 제가 뭘 읽었는지 정확히 설명할 자신도 없습니다. ㅎㅎ

[전날의 섬]도 스토리만 이야기를 하자면, 서너줄이면 요약이 됩니다. [장미의 이름]이나 [푸코의 추] 처럼 어떤 음모나 미스테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주인공의 삶의 궤적과 빈 배라는 고립공간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이야기들이 내용의 전부입니다. 그 뼈대에 붙여나가는 이야기들에서 움베르토 에코의 백과사전식 지식들이 켜켜히 쌓이고 그것을 음미하는 것이 또 재미겠지요.
박물관에 가서 '30년 전쟁 특별전'과 '중세 과학 특별전'을 보고 왔어 라고 짧게 요약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곳에 전시되어있는 물건들을 하나씩 꼼꼼하게 설명해가는 것이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저술 방식이니까요.

이 책의 재미있는 부분은 서술 방식인데요, 남반구 어느 무인도 근처에서 발견된 배에서 로베르토라는 인물이 기록해놓은 원고가 다량 발견되어 저자가 그것을 정리하고 주석을 달아놓는 방식으로 서술되어있습니다. 이것을 정리하는 '저자'또한 움베르토 에코가 만든 가공 인물(모델작가)이죠. 재미있는건 로베르토의 원고 속에는 자기의 경험담들도 있고 로베르토가 적은 소설도 있습니다.
작가 구조를 보자면 [실제 작가](움베르토 에코) - [가상의 작가](책속 '나') - [로베르토] - [원고]의 구조가 되는거죠. 작가가 3중입니다. 읽다보면 인용방식도 뒤죽박죽이라 작가의 '나'와 로베르토의 '나'가 마구 뒤섞입니다.
이 방식에 관해서는 움베르토 에코의 다른 책인 [하버드에서 한 문학 강의]에 자세한 설명이 나옵니다. 전에 그 책을 읽을 때는 막연히 그런게 있구나 싶었는데 [전날의 섬]을 읽다 보니 이게 그거였구나 하고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시공간적인 배열에서도 움베르토 에코의 작가적인 유희를 옅볼 수 있는데요, 텍스트 순서는 난파 이후부터 순차적으로 서술되는 듯하지만 주인공이 쓴 글들을 통해 과거와 배 위에서의 현재가 번갈아 나오며 과거와 현재가 만난 이후에는 주인공이 쓰는 소설속 공간과 배 위의 공간이 번갈아가며 나옵니다. 그 위에 (가상)작가가 코멘트를 하며 '실제 현재'가 끊임없이 개입을 하죠.

또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하며 서술 방식도 사실을 교묘하게 가장하는 방식으로 서술되는데 주인공 로베르토는 스스로 쓴 소설에 몰입해 가다가 급기야는 실제와의 경계선을 허물어간다는 점입니다.

이러한 구조적인 복잡성을 가리켜 역바 이윤기 씨는 역자 후기에서 '17세기의 사이버스페이스'라 표현하고 있는데 절대 과장된 표현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구조적인 재미 외에 실제 읽어가며 느낄 수 있는 재미는 에코의 박물학적 지식입니다. 30년 전쟁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중세 전쟁터가 어떠한지 옅볼 수 있고 주인공이 만나게 되는 여러 수사들과의 대화를 통해서는 17세기의 과학과 종교에 관한 이야기를 읽을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읽은 부분은 과학 이야기들이었고요. 천동설과 지동설 논쟁, 경도 측정방식, 허공(진공)에 관한 논쟁 부분들은 황당하면서도 그 시대엔 그랬겠구나 싶기도 합니다.

설정상 극적인 전개가 거의 불가능한 구조라 읽어나가면서 이게 과연 마무리가 어찌 될까 기대는 안하는 궁금함이 있었는데, 결말이 정말 대단하네요. 다른 분들의 리뷰를 보니 결말이 황당하다 혹은 허무하다는 분들이 많던데, 저는 짧은 결말 장면에서 가슴이 먹먹해지는 엄청난 비장미를 느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편소설은 모두 다섯 권이고 이 책이 순서상으로는 세 번째 소설입니다. 1994년에 발표된 작품이고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소개된 것은 1996년으로 되어있네요. 초판때는 두 권으로 나누어 출판되었는데 신판본으로 나오면서 한 권으로 묶였습니다.




덧글

  • gershom 2012/03/12 17:27 # 답글

    책을 읽을때..
    시방 내가 뭐하고 있는 건가.. 멍때리다가
    조금 재미있는 부분이 나와서 호오~ 그렇군, 그땐 그랬겠구나.. 하다가,
    또 멍 때리다가.. 다시 호오~.하다가.. 보니 다 읽었더군요..
    책 다 읽었다고 블로그 새글쓰기 열고 멍청하니 화면 쳐다보다 5분만에 닫았습니다.
    뭐라고 쓸지 감이 안잡히더군요. ㅜㅜ
  • bonjo 2012/03/12 21:24 #

    저도 거의 중반까지는 이게 뭐여... 싶었다가요 감이 잡히니 재미가 생기더라고요.
    개인적으로 에코 할배 소설 중 진입장벽이 가장 두터운 책이었습니다.
  • tuesday 2016/12/04 00:25 # 삭제 답글

    ㅎㅎㅎ. 그렇죠. 에코씨 소설 진입은 시간이 좀 걸리지요. 처음에는 끈기를 가지고 읽어야하는, 그러나 그뒤로 정말 재미있어지는, 인생에 손 꼽히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바뀌는 그런 이야기들이지요. 나누어주심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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