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그라운드 - 무라카미 하루키 / 양억관 역 ▪ Books

[먼 북소리]로 하루키를 읽기 시작하면서 [언더그라운드]를 계속 읽고 싶었는데, 안타깝게도 구판은 계속 절판 상태였습니다. 다행히도 작년 말에 [약속된 장소에서:언더그라운드2]와 함께 복간되었네요.

[언더그라운드]는 하루키의 본업인 소설도 아니고, 그동안 읽어왔던 기행문이나 수필집도 아닙니다. 굳이 장르를 따지자면 인터뷰집입니다. 1995년 오움진리교에 의해 벌어졌던 사린 테러사건의 피해자들을 만나 인터뷰를 하고 그것을 정리해 놓은 책이죠. 하루키는 이 책을 기획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최소화하기로 했고 실제로 질문 조차도 생략할 수 있으면 생략하는 방식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린 테러사건의 피해자는 수천에 이르니 모든 사람을 다 인터뷰 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고 일단 메스컴에 공개되어 이름이 알려진 700명 중 신원이 확인 가능한 140 명을 접촉해 인터뷰에 응한 60여명의 목소리를 녹음하고 녹취 전문가의 손을 거친 원고를 하루키가 다듬어 인터뷰를 한 본인의 확인을 거쳐 편집해놓았습니다. 인터뷰 대상이 된 사람 전원이 피해자는 아니고 피해자들을 진료한 의사들과 보상문제를 진행중인 변호사 등의 인터뷰를 통해 사건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삽입해 넣고 있습니다.
피해자라고 해도 산 사람만이 인터뷰에 응할 수 있겠습니다만, 심한 뇌손상을 입은 피해자나 사망자의 가족들의 인터뷰도 실려있어 피해자 본인 뿐 아니라 그 주변의 상처와 표정들도 살펴볼 수 있지요.

하루키가 이 책을 기획한 이유는, 사건이 터진 후 매스컴에서 보여주는 것은 가해자인 '저쪽'의 이야기 뿐이었고 피해자인 '이쪽'에 관해서는, 그리고 그 둘이 살고있는 세상은 어떻길래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런 설명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인터뷰를 통해서 하루키는 '이쪽'에 대해 충분히 듣고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사실 책을 읽다 보면 사건 당시에 대한 묘사는 다 비슷비슷합니다. 특별히 극적인 장면이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피해자들이 겪은 일들은 몇마디로 통일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살고있던 삶, 가고있던 목적지, 그 아침의 계획, 그들을 둘러싸고있는 관계들을 꼼꼼히 읽고 나면 그 동일한 사건의 기억들에 대해 함부로 동일하다라고 말할 수 없게됩니다.

논픽션의 힘. 이 책의 힘입니다.
더 끔찍한 사건이나 사고, 더 극적인 장면들을 영화나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만, 논픽션이 주는 감동은 허구의 과장된 표현들이 따라붙을 수 없는 힘이 있습니다. 어디서 태어났고, 어린시절엔 어떠했고, 어떤 꿈을 품고, 어떤 직업을 갖고, 평소에 뭘 좋아했으며, 어떻게 결혼을 하고, 자식은 몇 살이며, 앞으로의 계획은 어떠했다는 한사람 한사람의 세세한 삶의 결을 읽고 나면 그들이 겪은 아픔이 빼앗긴 인생의 요소들이 '테러를 당해 피해를 입었다'고 축약해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터뷰 당 열 페이지 조금 넘는 분량 정도로 묘사되었지만, 한사람 한사람의 삶이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읽여질 수 있는 것이로구나, 소중한 것이로구나 하고 거의 종교적 숭고함에 놀라게 됩니다.

700 페이지가 훌쩍 넘는 방대한 분량에도 전혀 지루한 것을 모르고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적당히 속도도 붙는 독서를 했습니다. 강추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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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sunjoy 2011/03/04 05:23 # 삭제 답글

    서평을 읽으니 마치 다큐멘터리 같은 느낌을 주는군요. 학창시절 하루키의 열렬한 애독자였는데, 그에 대한 관심이 희미해진 후에 번역된 것이라 이 책은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본조님의 리뷰와 예쁜 양장을 보고 나니 관심이 생기네요. 일단 위시리스트에 넣어놔야겠습니다.
  • bonjo 2011/03/04 09:47 #

    그렇네요 다큐멘터리! 제가 말이 늘 모질라서...-.-;;;
    한사람 한사람의 인터뷰가 그리 길지 않은 인간극장 같은 느낌이예요. 인생을 찬찬히 구석구석 자기 목소리로 비춰주는. 그러던 어느날! 사건이 터지는.
  • 덕순강아지 2011/03/05 14:29 # 답글

    얼마전 서점에거 살까말까 고민하다가 그냥 지나쳤는데

    한번 꼭 읽어보고 싶네요... 하루키는 비소설들이 더 재미있었어여..개인적으로.
  • bonjo 2011/03/06 21:07 #

    저는 하루키를 소설은 단편만 조금 접해봤고요 비소설류만 보고 있습니다. ^^;;
  • gershom 2011/03/08 22:41 # 답글

    이런 사건에 대한 논픽션이 기획되고 출판되는 환경이 부럽습니다.
    기획하고, 자료를 모으고, 추리고, 거르고, 다시 확인하고.. 하는 과정들을
    하루키라는 작가가 주도적으로 이끌었다는 사실도 부럽네요..

    저는 예전 열림원에서 나온 한권짜리 책을 가지고 있는데
    새로 나온 언더그라운드2권은 무슨내용을 담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 bonjo 2011/03/09 01:17 #

    저도 읽으면서 기획 자체에 놀라움이 컸습니다. 오탁구 정신의 위대함이랄까요...^^;;;

    2권은 가해자인 오움진리교측 사람들을 인터뷰한 내용이랍니다.
    왜 이런 사건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고찰 목적이라면 가해자 측도 들여다보는 것이 맞겠지요.
    구입은 했는데 다른 책을 읽고 있어서 아직 시작을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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