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생 혹은 대학 초년생 때 [장미의 이름]을 비디오로 보고 1차 충격, 이후 책으로 보며 2차 충격을 받은 후 움베르토 에코의 팬(비록 수준미달의 팬일지라도)이 되어버렸습니다. 이후 [푸코의 추]에 수차례 좌절하며 정말 어렵다고 생각하면서도 책이나 작가 탓을 해본 적이 없었을 정도로 [장미의 이름]에서 경험한 움베르토 에코의 지적 파워는 압도적이었습니다. [장미의 이름 창작노트]라는 책이 2002년에 출판되었습니다만 그 사실을 안 것은 이미 절판된지 오래 지난 후였습니다. 그랬던 책이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콜랙션의 이름으로 재출판 되었네요. 제목도 [장미의 이름 작가노트]로 바꾸어 달았습니다.
이 작가노트는 '소설가는 자기 글을 해설하면 안된다'는 전제를 갖고 시작합니다. 이 책은 [장미의 이름]이라는 복잡하고 방대한 지식더미를 해설하는 책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 창작을 했는지 '창작 과정을 해설'한 책입니다. 독자의 권리를 생각한다면 확실히 이쪽이 이야기의 해석보다 더 유의미합니다. 이야기의 발상, 조사, 구성, 파일링, 캐릭터 설정, 제목을 붙이는 것 부터 배경이 된 수도원의 역사적 지리적 배경, 수도원 건물들의 거리나 건물 내부 각 층의 계단 수와 환풍구 설정까지, 편집증적인 치밀한 계산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의 내적 설정 외에도 독자의 심리, 독자와 작가의 관계, 포스트 모더니즘의 시대적 의미와 그 위에서 자신이 저술할 표현의 형식까지, 만물박사 움베르토 에코의 오지랍은 끝이 없습니다. '머릿속에서 이야기가 샘솟는' 식의 작법과는 완전히 반대편 우주에 서있는 듯 합니다. 이 책을 읽을수록 소설 [장미의 이름]이 왜 그토록 재미있으면서도 얕볼 틈이 없이 치밀하기까지 납득이 갑니다.
분량은 100 페이지를 간신히 넘는 소책자로 페이지를 불리기 위해 [장미의 이름]에 인용된 중세 예술품들의 사진들이 실린 페이지는 단면인쇄가 되어있는 정도입니다. 책을 근수 달아 파는 것은 아니라 해도 100 페이지 짜리 책이 9,000원이나 한다는 게 좀 과하게도 보입니다만 1등급 한우 꽃등심의 밀도를 가진 책이라면 납득이 가는 가격이기도 합니다. [장미의 이름]을 읽어보셨거나 읽어볼 생각이 있는 분들께는 필독서라고 하고 싶네요.
덧글
wolfrain 2010/03/18 00:12 # 답글
bonjo 2010/03/18 00:19 #
일단 안읽은 책들을 우선으로 한 권씩 사고 있습니다. 디자인이나 제본상태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읽었던 책들도 마지막에 구입해서 놓으려고요. 부디 다 모으기 전까지 절판되는 일만 없기를 바랄 뿐입니다...-.-;;;
음반수집가 2010/03/18 00:51 # 답글
작가노트,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말씀 들으니 너무 땡기네요.
꼭 읽어보렵니다.
bonjo 2010/03/18 09:24 #
荊軻 2010/03/18 01:40 # 삭제 답글
bonjo 2010/03/18 09:25 #
CelloFan 2010/03/18 08:29 # 답글
bonjo 2010/03/18 09:28 #
여름 2010/03/18 23:57 # 답글
EP가 LP보다 좋을 수도 있죠.
아니다.100페이지라면 싱글B사이드로 볼 수 있을까요?
bonjo 2010/03/19 09:36 #
romeo 2010/08/18 07:25 # 삭제 답글
bonjo 2010/08/18 09:41 #
[전날의 섬]은 아직 제가 읽지 못한 책입니다. 밀린 숙제처럼 남아있는 책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