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두끈은, 왜? - 니컬슨 베이커 ▪ Books

제목부터 요상스러운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인터넷의 책 소개 글에서 이 책의 본문을 발췌한 내용을 본 후 무척 매력을 느꼈기 때문입니다.1) 아주 사소한 상황에 대해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정밀하게 묘사하며 심각하게 고민하는 모습이 무척 익살맞게 느껴졌다고 할까요. 그러나 정작 책을 구입해서 읽으며 느낀 감정은 익살맞은 것과는 거리가 먼, '당황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기존의 소설과는 거리가 상당히 먼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구조, 즉 플롯이란 것은 아예 존재하지를 않고 오로지 주인공의 시점으로 사물을 관찰하고 사고하며 그것을 꼼꼼하게 활자화한 것이 이 책의 정체입니다. 이야기상의 시간은 딱 한시간. 주인공이 점심시간을 이용해 끊어진 구두끈을 사기위해 잡화점에 다녀오는데, 그 동선에 교차하는 직원과의 짦막한 대화, 화장실, 에스컬레이터, 구두끈, 핫도그, 쿠키, 우유, 공원 벤치, 식사+독서하는 이야기들이 배열되어있고 그 행동들과 장소에서 접하는 대화, 사물, 소리, 생각 등등으로부터 여러가지 연상과 상상이 동원됩니다. 이 연상과 상상에 기반한 사고의 흐름이란 것이 무척이나 독특한 재미를 주는 것이죠. 비슷한다고 생각할만한 것이 움베르토 에코의 저작들인데, 움베르토 에코의 사고 연쇄반응이 그 머릿속에 담겨있는 방대한 분량의 지식에 기반한다면 니컬슨 베이커의 연쇄반응은 상상력에 기반합니다. 예를 들면 우유를 살 때 점원이 던진 "빨대 드릴까요?"라는 질문으로부터 자신이 빨대를 이용하는 경우와 이용하지 않는 경우에 대한 생각, 예전의 종이 빨대에서 플라스틱 빨대로 바뀌면서 좋아진 점과 나빠진 점, 사용자 입장에서 대표적인 나쁜점인 탄산음료에 빨대를 꼽을 경우 둥둥 뜨는 단점,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페스트푸드 메이커들이 취한 방법, 빨대의 종이포장이 불편한 점, 부드럽게 구부러지는 빨대의 모양에 대한 생각 기타등등 기타등등... 한참을 읽다보면 정상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집요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어쩌면 니컬슨 베이커라는 작가가 그러한 정신분석학적인 측면에서 저작을 한 것일수도 있겠습니다. 만은, 그정도 수준이라면 제가 이해할리가 만무하다는 것이 이 독서의 한계이겠지요.
 
움베르토 에코 외에 또 한가지 떠오른 것이 있다면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사뮤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입니다. 그 작품의 중간쯤, '럭키'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정신이 이상한 노예 정도의 캐릭터입니다. 럭키의 주인인 뽀조가 럭키에게 "생각해!"라고 명령을 내리면 럭키는 혼자서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생각"이라는 것이 어마어마합니다. 사람이 골똘히 한가지 주제에 대해 집중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 연상을 하는 경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연상작용이 멈추지 않게 되지요. 원숭이 엉덩이에서 시작해서 백두산 까지 가는 식으로 말이지요. "럭키"의 예에서는 그 연상이 아무런 절제 없이 무한대로 뻗어나가는 겁니다. 제가 그 연상작용을 어마어마하다고 생각한 이유는 [고도를 기다리며]는 연극을 위한 희곡이라는 점입니다. 럭키 역을 맡은 배우는 그 방대한, 전후 맥락이라고는 원숭이 엉덩이와 사과 정도밖에 없는 그 대사들을 외워서 생각의 속도로 무대 위에서 내뱉어야 한다는 것이죠. 사뮤엘 베케트가 럭키의 "생각"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것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저는 "럭키의 생각하는 장면"을 읽고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고도를 기다리며]을 무대에서 꼭 봐야겠다고 다짐을 했을 정도였습니다. 
니컬슨 베이커의 "생각"은 럭키의 그것만큼 마구 달려나가지는 않습니다만, 이쪽도 만만치는 않습니다. 적절히 절제되며 합리적인 연상과정을 거치지만 양은 훨씬 방대하고 절제되는만큼 치밀하며 집요합니다. 과대망상, 편집증, 집착 등 사이코 드라마를 보며 연상할 수 있는 용어들이 떠오릅니다.

이 절제된 연상작용들은 큰 흐름을 벗어나지 않는데, 가끔씩 의도적으로 줄기를 벗어나기 위해 '각주'를 이용합니다. 각주는 보통 구조상 본문에서 직접 설명하기 어려운 것을 짧막하게 풀어주기 위해 사용되지만 니컬슨 베이커의 각주는 전혀 다릅니다. 본문과 진배없는 어마어마한 양으로 질리게 할 뿐아니라 내용도 본문과 다를바 없습니다. 다만 본문과 다른 방향으로 별개의 연상을 진행하기 위해 사용할 뿐입니다. 본문이 남한강이라면 각주는 북한강 정도라고나 할까요. 이러한 방대한 양의 각주 때문에 책의 편집 자체도 특별한 형태를 갖게 됩니다. 책이 일단 기본적인 책의 형태에 비해 위아래로 길쭉한 편이고 페이지의 면을 6:4 정도로 나누어 본문을 윗쪽 부분에만 넣고있고 아랫쪽은 비워놓고 각주 전용 공간으로 사용합니다. 가끔씩 각주가 터무니없이 많은 경우에는 페이지 전체를 각주로 뒤덮는 경우도 있습니다.

처음에 읽기 시작했을 때에는 익숙치 않은 형식에 좀 질려버린 느낌도 있었습니다만, 중간 이후 적응이 된 이후에는 니컬슨 베이커의 연상 놀이를 충분히 즐길 수 있게 됐습니다. 책의 분량은 200P 정도로 그리 많은 편에 속하지 않습니다만 읽는데는 비교적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워낙 연상과정이 연쇄적으로 끊임없이 튀어나가고 세밀한 묘사들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느라 문장을 읽는 속도가 느렸고 거기에 본문과 각주를 오가는 어려움이 더해진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이 책의 원제는 The Mezzanine 입니다. 태어나서 처음 접하는 단어인데, 대형 로비 등에 딸린 중간층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 엘리베이터가 멈추지 않고 에스컬레이터로만 접근 가능한 이 층에 주인공의 사무실이 있고, 주인공은 이 중간층에서 내려와 구두끈을 사고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중간층의 사무실로 올라갑니다. 어쩌면 위치적인 설명 뿐 아니라 사무실과 구두끈 쇼핑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히 많은-그러나 일반적인 엘리베이터들로는 갈 수 없는- 사고의 흐름을 중의적으로 표현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간을 좀 두고 조만간 다시 읽어 볼 계획이며, 니컬슨 베이커의 다른 저서가 국내 출판된 것이 또 있는가 찾아보니, 없군요...-.-;





1) YES24의 책 소개 중에서
어떤 엘리베이터는 승객이 미어터지고, 어떤 엘리베이터에는 단 한 사람만 타고 있을 것이다. 뒤의 경우를 상상해본다. 더할 수 없이 은밀한, 진정 자유로운 순간. 회사 화장실 칸에 들어가 있을 때보다 더 자유롭다. 큰 소리로 말을 하거나 노래를 불러도 엿들을 사람이 없으니까. L은 가끔 엘리베이터에 혼자 있을 때 스커트를 머리 위로 뒤집어쓴다고 했다. 나도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면 장난감 병정 걸음으로 벽 속으로 들어가는 시늉을 하곤 했다. (……) 이런 은밀한 자유의 순간은 에스컬레이터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렇더라도 나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서만 사무실에 갈 수 있는 흔치 않은 여건이 마음에 들었다. 엘리베이터를 탈 때의 모든 사소한 의식에 날마다 참가해야 하는 것보다는 나았으니까. 엘리베이터에 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눈을 들어 층수가 바뀌는 것을 지켜보아야 하고, 사람들이 타면 경건한 표정으로 ‘열림’ 버튼을 누르거나 고무로 된 도어센서를 잡고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의 대화 끄트머리를 듣게 되면 음모에 가담하거나 교활한 짓을 한 기분을 느껴야 하는 것도 그렇다.
--- pp.116~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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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글

  • 荊軻 2009/03/13 11:55 # 삭제 답글

    버지니아 울프 같은 맥락의 소설인가요

    뜬금없이 [목마와 숙녀]의 박인환이 생각나는군요
  • bonjo 2009/03/13 12:40 #

    버지니아 울프는 읽어보질 못해서 잘 모르겠네...-.-;;
    책 한권 전체가 맨 아래 발췌해놓은 부분과 똑같은 형식이야. 스토리 전혀 없음;
  • 여름 2009/03/13 14:31 # 답글

    YES24의 책소개에 대한 제 감상은 "PUNK"네요.
    그냥 PUNK.
    근데 Bonjo님의 책에 대한 해석글은 책을 Progressive punk rock으로 만들어 버린 것 같습니다.
    에코가 나와서 그런가?
    4월에 읽어보겟습니다.
    제가 은근 뜬금없는 책들을 좋아하거든요..^^
  • bonjo 2009/03/13 16:16 #

    와오- 펑크. 음악에 빗대어 책을 설명하는건 상상도 못했네요. 아닌게 아니라 저 발췌부분은 펑크같군요. 그런데 전체적인 책 분위기는 프로그레시브 그것도 좀 딱딱하고 구조 복잡한 프로그레시브요. 굉장히 사소한 이야기들을 마치 논문 쓰듯이 하고 있거든요.
    뜬금없기로는 제가 접해본 책중에 최고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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